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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리모델링 중인 하리하우스에서 데크 난간에 오일스테인 칠 작업을 마치고 건축주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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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하리하우스 건축주 자녀인 지승이와 지윤이 나무판자를 나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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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하리하우스 건축주 부부가 1층과 2층의 방부목 난간에 도색 작업을 하고 있는 중

리모델링 중인 땡볕에서 건축주 가족이 방부목 데크 난간에 투명 오일스테인을 칠하고 있다. 방부목의 자연미를 살리기 위하여 건축주가 투명 오일스테인을 칠하기로 결정 했다. 보통 도토리색이라 불리 우는 계통으로 데크에 페인트칠을 하지만 건축물에 비하여 데크의 규모가 있어 도색을 하면 건축물이 전반적으로 어두운 느낌을 줄 것 같기도 하고, 원목의 느낌을 살리기에는 칼라 보다는 투명을 선택하는 것이 현재의 건축물의 재료의 구성과 느낌상으로 좋을 것 같아 투명으로 난간 및 데크 마루를 칠하기로 결정하고 건축주 부부가 주말에 내려와서 도색 작업을 했다. 도색 작업은 비교적 단순한 일로 하리하우스의 건축물 특성상 별 다른 어려움 없이 건축주 부부가 140M에 이르는 방부목 데크 난간 작업을 끝마쳤다. 다음 주 중으로 바닥 면을 투명 오일스테인으로 칠 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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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지윤이네 하리 하우스 본채 뒷면 전경

1973년... 새마을 운동이 절정에 이르고 수출 100억불을 외치던 시절에 충북 단양군
적성면 하리에 양조장 건물이 신축 되었습니다. 그 시절 고향 떠난 누나와 형아들이 서울 구로공단과 울산공단에서 티셔츠도 만들고 유조선도 만들면서 오로지 고향땅 부모님과 조국 근대화의 희망찬 미래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며 모두가 열심히 일하던 시대 였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박정희 군사독재 정부의 장기집권 시도가 진행되고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절대 자유와 인권은 한국적 민주주의를 앞 세운 유신헌법이라는 정치적 틀속에서 독재에 짖눌리고 살았던 암울한 시대가 1970년대 입니다.

                         Hari Hous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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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사람들이 생각하는 건축물이 2006년에 비교적 온전히 하리마을에 흘러간 세월만큼의 연륜과 멋을 뽐내며 실개천이 옆으로 다정 다감한 건축미를 자랑하며 마을의 중심축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텃밭 끝자락에 남쪽을 향해 직사각형 2층 건축물은 언듯 봐도 1970년대 건축물이 보여주는 낯익은 감성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시절 서울시 성북구 하월곡동 일대에도 산비탈을 따라 벽돌로 쌓고 미장으로 마감한 주택들이 들려주는 서민들의 주거건축 양식을 볼 수 있지만 애석하게도 재개발의 광풍에 정감어린 달동네의 붉은색 기와지붕과 스레이트 지붕으로 연결된 지붕 마루들이 보여주는 풍경과 그 안으로 이리저리 연결된 비탈길 골목길의 정경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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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도 정말 다행이도 지윤이네 하리 하우스는 1970년대 후반을 살아갔던 사람들이 느꼈던 집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 깃든 가슴과 집을 바라보는 합리적인 건축관을 간직한 그 시대의 건축물이 비교적 온전히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비록 당시 경제적 상황과 건축기술과 건축자재의 낙후성으로 벽돌과 철근콘크리트로 조합된 단순한 외양과 내부 구조로된 평범한 건축이지만 정말 튼튼하기 그지 없는 토치카처럼 단단한 구조를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1층에서 2층 지붕면을 떠받치는 벽체는 눈 짐작으로 재어봐도 30CM가 넘을 것 같았습니다. 와~! 요새구나! 프랑스가 독일 침공에 대비해서 구축 했다던 그 벙커도 지윤이네 하리 하우스 벽체보다는 단단하지 않겠단 생각이 스쳐 지나갔으면 말 다했지요? 그래서인지 30년이 넘은 단순한 조석식 벽돌 건축물에 균열(crack)을 발견 할 수 없었습니다. 건물 외관만 잘 관리해 주면 앞으로도 100년 아니 그 이후의 또 한 세기를 사용해도 별 문제가 없을것 같은 집이 하리 하우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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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윤이네 하리 하우스는 1층은 막걸리 만드는 작업장이고 2층은 살림집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요즘 건축물로 말하자면 1970년대 봉재산업의 메카였던  구로공단자리에 우후죽순 들어서는 공장형 오피스 빌딩과 맥을 같이하는 스타일 입니다. 다른 특별한 설명으로 지윤이네 하리 하우스의 건축적 발견을 이야기 할 필요도 없이 간단하게 2층 살림집 후면에 있는 창문 만으로 이야기 합니다. 2층에는 용도에 따라 구획된 공간에 하나의 창문이 달려 있습니다. 모두 5개의 창문이 있는데 그 크기가 모두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사진 왼쪽 작은 창문이 있는 공간은 화장실과 욕실 입니다. 당연히 누가 볼까봐 창문을 작게 만들었고 두번째 제일 큰 창문은 안방 창문 입니다. 사람이 주로 거주하는 메인 공간의 창문을 크게 만들어 놓아 햋살과 창밖 전망을 고려한 크기라는 것을 짐작 할 수 있습니다. 세번재는 주방 창문 입니다. 네번째 건너방 정도의 용도로 사용되던 공간의 창문이고 마지막이 요즘으로 치자면 다용도실 용도의 공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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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에너지의 효율적 이용에 대한 생각으로 각 창호의 크기가 용도별로 정해지고, 열 손실을 최소화 하기위한 생각으로 전체적으로 창문의 크기가 작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것이 그 당시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건축을 바라보는 생할 건축이고 삶의 지혜가 묻어나는 건축물로  현실과 환경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나타나는 역사성을 간직한 건축물이 하리 하우스 입니다. 지금 처럼 돈 많이 들여서 건축설계를 맡겨서 집을 짓는 일명 스타 건축가들이 만들어 내는 관념적 건축과는 구별되는 우리 시대의 건축물이라 이야기 해도 누가 아무도 뭐라고 그러지 아니 하겠지요. 그 귀엽고 사랑스러운 창문이 있는 지윤이네 하리 하우스는 있는 그대로 보존하고 수리해서 살기로 했답니다. 참으로 그 집 주인은 역사와 미래에 대한 현명한 미적 감각과 건축적 안목을 가진 멋진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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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지윤이네 하리 하우스에 대한 자가보수 이야기를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지윤이네 하리 하우스 홈페이지 집수리 카테고리에 올릴 생각 입니다. 오늘은 지윤이네 하리 하우스가 갖는 건축적 의미와 하리하우스의 역사적 상징성에 대한 간단한 소개로 집수리 이야기를 끝내야 겠습니다. 한 마디 더하고 끝내야 겠습니다. 집은 사람이 살면서 수리하며 가꾸는 재미가 있어야 제대로 된 집입니다. 그 집을 수리 하면서 세대간의 벽을 허물고 가족간에 사랑과 신뢰와 믿음이 쌓일때 인간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진짜 좋은 집으로 자자손손 보존되며 이야기 될 수 있겠지요. 할아버지의 손길과 추억이 깃든 집, 아버지의 땀과 사랑이 깃든집, 엄마의 정성스런 손길이 깃든 집, 그런 집과 몇년 후에 오를 집값을 바라보고 사는 집... 어떤 집이 사랑스럽고 정감있는 좋은 집이란 것을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집에 대하여 한 번쯤은 생각해 볼 만한 가치는 있을 듯 합니다.

지윤이네 하리하우스 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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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삶에 건축 달동네... 내 기억속에 풍경


나의 기억 속에 들어있는 달동네에 대한 풍경이다. 소구리 문화지도에서 포토 다큐서울을 진행하면서 기억 속에서 희미해졌던 유년의 풍경을 좀 더 명확하게 되찾았다고 말하는 게 진실이다. 그 달동네가 지금쯤 어떤 모습으로 변해있는지 궁금하다. 예정대로 라면 2005년도쯤에 다큐서울 2005프로젝트가 진행되었어야 했다. 어찌하다 보니깐 계획만으로 끝난 포토 다큐서울 2005가 되어버렸지만 2001년 달동네의 서정을 보여 주는 것만으로 현재로선 만족해야 한다. 그래도 10년 후에 다큐서울 프로젝트가 실천 된다면 10년 전의 달동네가 보여주었던 따뜻한 삶의 리얼리티를 보여 줄 수 있어 그나마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집에 관련된 생각을 많이 한다. 지윤이네 하리하우스 는 고향땅 적성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 집을 바라보고 생각하면 세월이 많이 흘러갔음을 느끼게 된다. 귀거래사... 농촌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은 그 귀거래사 본능이 누구보다 강한 것 같다. 나도 그렇지만 이 땅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들의 가슴속에 들어있는 귀소본능은 추석과 설에 보여주는 풍경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집이란 무엇인가? 요즘은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한 삶에 터전이 집이다. 그 것도 아파트로 대표되는 공동주택이다. 그 돈 때문인지 몰라도 삶의 지혜와 용기가 깃들어 있는 우리네 달동네가 하나둘씩 모두 거대한 직사각형 시멘트 기둥으로 변해가고 있다. 아쉽기는 하지만 21세기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원하는 일이니 뭐라고 막 화낼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뭔가 아쉬움과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나만 그런 건지 모두가 그런 마음인지는 몰라도 달동네 사람들이 만들어낸 삶에 건축이 사라져가는 것이 아쉽다. 그 추억의 골목길과 구멍가게와 가파른 시멘트 포장도로와 계단들이 아파트 축대와 성냥갑 집으로 변해가는 것이 아쉽다. 그 위로 그리스 산토리니의 풍경이 오버랩 되어지면 좀 더 아쉬움이 크게 다가온다.


추억의 골목길을 찾아서...